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엿듣기

Posted at 2010/08/02 20:05 in 분류없음 by 구루루
1.
며칠 전 티비에서 '타인의 삶'이라는 영화를 봤다.
옛 동독의 비밀경찰이 어느 예술가를 감시하기 위해 도청을 하다가
타인의 삶에 동화되어 간다는 내용이다.
완전히 몰입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다.

2.
며칠 전 학교의 모 행정부서에 갔다가 일이 처리되기를 기다리면서
본의 아니게 어떤 여성 직원분의 통화를 들었는데,
그분은 단지 10여 초 간 세 문장만을 이야기 했을 뿐이었으나
이제 막 데이트를 시작하는 사이의 사람에게 온 전화 같다는 생각을 했다.
오늘 쪽문 앞에서 퇴근하는 그 분과 또 나란히 가는 남성분을 봤다.
괜히 신이 난다.
그 둘이 누군지도, 어떤 관계인지도 모르면서
그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이 든다.

3.
저녁에 쪽문에서 혼자 밥을 먹는데
옆 테이블에 앉은 학부생으로 보이는 두 여학생이
소개팅 했던 이야기와 호감을 가진 남학생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.
아. 너무 재밌다.
가게가 좁아 나와는 50cm도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
한마디 한마디까지 다 들렸고
나는 최대한 못들은 척 그냥 배경인 척 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.
혹시나 눈치채고 다른 이야기를 할까봐서.

4.
밥을 먹는 10여분간 그저 듣기만 했는데도
그 학생이 어떤 타입의 남자를 좋아하는지,
남자들의 어떤 점이 부담스러운지,
그래서 그 학생의 성격은 어떤지까지 잘 알게 된 것만 같다.
가장 편한 사이에서만 할 수 있는 말을 엿들었기 때문이겠지.
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닐텐데.
나에게 금지된 것을 듣고 알게 되었다는 쾌감.
아뿔싸. 이거 관음증인가.

5.
나는 말하는 것보다 듣는 걸 좋아한다.
듣는데 정신이 팔려 마냥 듣고만 있다가
'나만 말하니까 재미없다, 이제 네 차례'라는 말을 들으면
머리 속이 하얘져버린다.
공부를 할 때에도 남들이 다 아는 내용은 별로 흥미가 가질 않고
누가 모른다고 할 때는 엄청난 열의로 그걸 알려고 했었더랬다.
성적은 그저 그랬어도 나보다 공부 잘했던 친구들에게 문제를 풀어주기도 했었으니까.
아마 내가 에덴동산에 있었더라면 뱀이 꾀기도 전에 선악과를 따먹었겠지.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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